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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략)
건축적 욕망이란, 모든 문화적 욕망이 다 그러하듯, 근본적으로 잉여의 욕망이다. 기능적 필요만 딱 만족시키기 위해 옷을 입는다면, 패션이라는 문화는 발생할 수 없다. 같은 논리로, 생존하기 위해서만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 그들에게 건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건축사가들이 건축을 '쓸모없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왕이면 더 우아한 공간에서 살고 싶은 욕망, 더 근사하게 차를 마시려는 욕망, 더 아름다운 것을 보고싶은 욕망, 이러한 것들은 다 기초적인 기능을 넘어서는 삶의 잉여분들이다. 바따이유는 그러한 잉여 에너지들을 어떻게 소비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된다고 본다. 그래서 그에겐 생산이 아니라 소비의 문제다. 소비하지 않는 삶이란, 삶을 유지만 하는 삶으로, 삶을 살지 않는 삶 곧 무의미한 삶이기 때문이다. 요즘 누구 할 것 없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건강. 그런데, 그 건강함으로 어떤 삶을 살겠다는 건강의 목표, 그러니까 건강을 소비할 삶의 내용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삶을 느끼고 향유하는 것이란, 생존 에너지 그 이상 곧 잉여 에너지를 발생시켜 그것을 즐겁게 소비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건축이 출현한 것도 이 지점에서다.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할 어떤 물리적인 세계를 꿈꾸면서, 끊임없이 그 방도를 모색하며 어떤 제작행위를 통해 구체화 하고자 하는 욕망. 건축은 그로써 출현한다. 다시 말하건대. 건축이란 이상향 혹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세계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그 세계를 이런저런 형태로 살아보고 싶은 욕망으로 잉태되어, 그것을 현실적으로 제작해 낼 수 있을 기술을 치열하게 탐구하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 태어난다. 그러니, 건축이란 환타지와 탐구가 낳은 자식이라 해야겠다. 그런데 안빈낙도의 태도는 이러한 잉여에너지를 원천적으로 포기시킴으로써, 환타지를 무력화 시키고 탐구욕을 좌절시켜 종국적으로 건축적 욕망을 거세한다. 우리가 익히 알아온 땅을 벗어나 아직은 이름이 없는 그 바깥의 땅에 나가 살고 싶은 욕망, 근본적으로 다른 공간에 살고자 하는 욕망, 마치 시인이, 꿈틀거리는 무엇에 손을 대어가며 혹은 그 위에 덮인 작은 돌을 하나 둘 걷어내며,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조심스러운 호기심에 차 있듯, 건축은 그렇게 다른 형태의 삶을 살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한다. 없는 무엇을 현존시킨다는 뜻을 지닌 아키텍쳐(architecture) 곧 으뜸짓기라는 말이 시(poetry)라는 용어와 맞닿는 것은, 그 까닭이다.
- '텅빈 충만' p.37-38, 이종건, 2004년, 시공문화사
Posted by erte





















